느림 독서

변화 없는 다독 대신 느림 독서를 택한 이유

woogi0777 2025. 6. 29. 02:55

한때 나는 다독을 자랑처럼 여겼다. 서점에서 신간을 사서 쌓아놓고, 한 달에 몇 권을 읽었는지 숫자로 기록했다. SNS엔 ‘이번 달 독서 리스트’를 올리고, 책장을 꽉 채운 내 모습에 뿌듯해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한 공허함이 남기 시작했다. 분명 책은 많이 읽었는데, 내 삶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감정도 사고도 깊어지지 않았고, 인간관계나 일상의 선택에도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았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소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부터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더 많이가 아니라, 더 깊이 읽는 독서를 선택하기로. 그렇게 시작된 느림 독서는, 내가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생각하는 시간’과 ‘변화의 시작점’을 다시 되찾게 해주었다.

다독 말고 느림 독서

 

 

다독의 착각: 읽었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니다 

 

과거의 나는 책을 많이 읽으면 자연스럽게 나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자기계발서, 심리학 책, 관계에 관한 책들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었다. 하루에 2시간, 때로는 출퇴근 시간까지 활용하며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떤 책을 읽었는지조차 금방 잊혀졌다. 밑줄을 긋긴 했지만, 그 밑줄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책을 덮고 나면 감동도, 통찰도 없었다. 책의 수는 늘어났지만, 나의 내면은 제자리였다. 문제는 속도도, 양도 아니었다. 내가 책을 '관통'하지 않고 '통과'했기 때문이었다. 핵심만 뽑고 결론만 기억하려 했던 독서는 지식을 남겼지만, 사유를 남기지 못했다. 그리고 변화란 단지 정보를 얻는다고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 정보를 ‘삶에 녹여낼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느림 독서는 책과 나 사이의 ‘진짜 관계’를 만들었다

 

느림 독서를 시작하면서, 책을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하루에 딱 10페이지, 단 한 문장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느끼고, 연결해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책을 천천히 읽자 문장의 질감이 달라졌다. 단어 하나에도 멈춰 서게 되었고, 저자가 왜 그런 문장을 선택했는지를 상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문장을 내 삶에 적용하려는 질문이 생겼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했지?”, “이 말은 내 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빠르게 읽는 동안에는 생기지 않던 질문과 감정이 느림 독서에선 자연스럽게 피어올랐다. 독서는 더 이상 정보 섭취가 아니라 나와 책이 대화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 대화가 계속될수록 책은 책장에서 사라지지 않고, 내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변화 없는 다독과 달리, 느림 독서는 내 삶에 실제 ‘움직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느림 독서가 만들어준 변화는 숫자보다 선명했다

 

다독을 하던 시절에는 책의 숫자만 기억에 남았고, 느낌이나 통찰은 희미했다. 하지만 느림 독서를 실천한 이후, 나는 읽은 책의 제목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 책이 내 삶을 어떻게 바꿨는지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예를 들어, 관계에 대해 쓴 책 한 권을 느리게 읽으며, 나는 타인의 말에 반응하기보다 관찰하는 연습을 시작하게 되었고, 실제로 인간관계의 질이 달라졌다. 또 한 권의 철학서를 30일에 걸쳐 읽으며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고, 감정이 격해질 때마다 떠오르는 문장이 생겼다. 이런 변화는 단순히 독서의 양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삶과 연결된 독서, 그것이 느림 독서가 가진 힘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도 그 문장이 내 하루에 영향을 주는 것, 그것이 진짜 독서의 본질이자, 느림 독서가 주는 가장 강력한 변화였다.

 

나는 이제 변화 없는 다독보다, 변화가 남는 느림을 선택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한 달에 몇 권 읽기 챌린지'나 '올해 100권 읽기' 같은 목표를 세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그 숫자가 나를 바꾸어 주지 않는다는 걸 체감한 지금, 나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 책이 내 삶을 어떻게 바꿨는가?" 이제는 책 한 권을 두세 번 읽기도 하고, 몇 달을 두고 천천히 완독하기도 한다. 읽는 중간에 멈춰 메모를 남기고, 문장을 곱씹고, 현실과 연결해보는 시간도 즐긴다. 빠르게 읽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그 속도에서 ‘진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멈춰야 한다는 뜻이다. 느림 독서는 나에게 ‘생각의 리듬’을 돌려주었고, 책이 삶과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나는 더 이상 숫자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제는 책을 통해 내 감정이, 행동이, 사고가 달라졌을 때 그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변화가 없다면 읽지 않은 것이고, 변화가 남는다면 그건 이미 내 삶의 일부가 된 책이다.

 

 

많이 읽는다고 변화가 따라오는 건 아니다. 읽은 만큼 사유하고, 적용하고, 감정을 연결해야만 책은 내 것이 된다. 다독을 하던 시절, 나는 책을 소비했지만 변화하지 않았다. 하지만 느림 독서를 실천하며, 책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고, 나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빠름은 성취감을 주지만, 느림은 방향을 바꾼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읽고 있지만, 이제는 천천히, 오래, 깊게 읽는다. 더 많은 책이 아니라, 더 많이 나를 바꾸는 책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느림 속의 독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