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 독서

천천히 읽는다는 건 결국 자신에게 귀 기울이는 일

woogi0777 2025. 7. 4. 02:40

언제부턴가 책을 읽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페이지 수는 늘고, 읽은 책은 많아졌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비어 있었다.
줄거리도, 작가의 목소리도, 내 감정도 희미하게 떠오를 뿐.
그때 문득 생각했다.
“나는 지금 책을 읽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넘기고 있는 걸까?”

빠르게 읽은 문장은 머릿속에만 남는다.
하지만 천천히 읽은 문장은 가슴속에 남는다.
그리고 그 문장은, 나에게 묻는다.
“지금 네 마음은 어떤지, 네가 잘 지내고 있는지.”

천천히 읽는다는 건 내안으로 들어가는 걸까?

 

문장을 듣는 게 아니라, 나를 듣는 시간

 

천천히 느리게 읽는다는 건 사실 문장을 더 잘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오히려, 문장을 핑계 삼아 나 자신에게 귀 기울이기 위한 시간이다.
책을 읽다 어느 문장에서 발이 멈출 때가 있다.
다른 사람은 그냥 지나치는 평범한 문장.
하지만 나에게는 깊은 숨이 필요한 순간처럼 다가오는 그 한 줄.

“당신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눈동자는 그렇지 않았다.”

이런 문장을 만났을 때 나는 문장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된다.
책 속에서 울리는 말이 사실은 내 안에서 오래도록 눌러놓았던 감정의 메아리였다는 걸 느낀다.
그래서 천천히 읽을수록, 더 많이 멈추게 되고, 되묻게 되고, 결국 나를 듣게 된다.

 

속도는 외부의 것이고, 귀 기울임은 내면의 것이다

 

세상은 늘 더 빠르게 움직이라고 말한다.
3분 요약, 핵심 정리, 속독법.
모두가 속도를 이야기할 때, 나는 멈추는 법을 잊었다.

하지만 책은 조용히 나에게 말을 한다.
“천천히 와도 괜찮아. 여기 있을게.”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책이 아니라 내가 나를 기다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느리게 읽는다는 건 타인의 속도에서 빠져나와, 내 호흡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모두가 달리고 있을 때, 나는 걷는 법을 선택한 사람처럼.
그 느림은 나를 세상과 비교하지 않게 하고, 오히려 나를 존중하게 만든다.

 

책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 나는 나에게 대답한다

 

어느 날, 에세이 한 권을 천천히 읽고 있었다.
작가는 담담하게 자신의 상실을 이야기했고, 나는 그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처럼 느꼈다.
그때 책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때 당신도 외로웠죠?”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책은 이어서 말했다.
“괜찮아요. 저도 그랬거든요.”

그 대화는 실체 없는 활자였지만, 그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나를 감쌌다.
그건 단지 작가와 독자의 연결이 아니라, 나와 나 사이의 대화였다.
천천히 읽는 독서가 가능한 이유는, 내가 나와 마주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빠르게 지나가는 문장들은 대답을 요구하지만,
느리게 읽는 문장은 묻지 않는다. 그냥 곁에 머문다.

 

읽는 시간보다, 머무는 시간이 나를 만든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느냐가 아니라, 그 책 안에서 내가 얼마나 오래 머물렀느냐이다.

한 문장에서 하루를 보내본 적 있는가?
책 한 페이지에서 삶 전체를 되돌아본 적 있는가?
그 경험은 속도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다.

느린 독서는 단순히 텍스트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남아있는 문장에 오래 머무는 일이다.
그 머무는 시간이 쌓여,
어느 순간 나는 더 단단한 사람, 더 부드러운 시선, 더 깊은 감정을 가진 사람으로 자란다.
책을 천천히 읽는다는 건, 결국 나를 정성스럽게 돌보는 일이었다.

 

 

천천히 읽는다는 건 세상을 덜 사랑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신을 더 사랑하겠다는 의지이고, 삶을 더 진지하게 대하겠다는 고백이다.

빠르게 지나가는 모든 것 속에서,
나는 일부러 멈춰 선다.
문장을 천천히 따라가고, 마음을 천천히 꺼내본다.
그 모든 느림의 선택 끝에는 언제나 내가 있다.

책을 읽는 시간, 결국은 나를 듣는 시간이다.
나는 오늘도 그 시간을 기다린다.
천천히, 그리고 따뜻하게.